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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낭구일상

내가 어릴적에...

내가 어릴 적에...

 

 

그러니까 한 삼십구년 전쯤...

서울 용산의 한강다리 근처에서 살았었다.

 

하루는 학교를 파하고 친구들과 집으로 가고 있는데 온통 집들을 철거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그 철거라는 것이 뭐 중장비로 하는 것도 아니고

집을 굵은 동아줄로 묶어서 양쪽에서 으이샤으이샤 몇 번 하면 푹 주저 앉아버리는 그런 철거였다.

하긴 구멍이 숭숭 뚫린 벽돌로 지은 집이었으니 힘없이 내려 앉을 수밖에...

그 좋은 구경거리를 마냥 신기해하며 신주머니를 돌리며 집으로 갔다.


그런데...

우리 집이 없어졌다.

우리 집도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슬픈 일이었을 텐데 가방 두고 나가 놀아야 하는 나는 가방 둘 곳이 없어진 것에

조금은 섭섭해 했던것 같다.

"재영아! 어여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삼륜차에 이삿짐을 잔뜩(그때는 그렇게 보였다)싣고서

아버지와 엄마가 부르시며 손짓을 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엄마의 눈물을 닦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 친구 분이 우선 빌려 주셨다는 모래내(지금의 시천교 옆, 조금은 길보다 낮았던)의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렇게 신당동,사근동,용산을 거쳐서 모래내에 입성(?)을 했었다.

거기서 이삼년은 산 것 같다.


아버지는 그 모래내의 셋방에서 살면서 언제 집을 지으셨는지

우리 집이 생겼다며 가보잔 말씀에 따라 나선 곳, 그곳이 산동네의 방이 두간에 가운데가 부엌이 있는

큰(그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집이었다.

나는 정말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때까지 우리 집은 이사 갈 때마다 아버지께서 집주인이라며 인사드리라는 말씀에

늘 집 주인께 절을 하곤 했던 셋방살이였는데...

이젠 절을 안 드려도 맘껏 뛰놀 수 있는 우리 집이 생긴 것이다.

그때가 초등학교 오륙학년 시절이다.


그 집은 그 동네 자체가 그렇듯이 개별 집에 수도가 없었다.

동네의 중간쯤에 공동수도가 있어서 물지게를 지고서 수돗물을 받아 한 통에 얼마씩 돈을 주고

사먹는 그런 동네의 집이었다.

지금도 엄마가 그 비탈진 좁은(물지게를 옆으로 지고 가야하는)길을 비척대고 오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해가 머리 위에서 저쪽 한강 쪽으로 중간쯤 있을라 치면 저 밑에서 다리가 너무 예쁜(새 다리라 했었는데 ^^)누나가 파란 교복에

파란 가방을 들고 오는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그때는 고등학교를 시험을 쳐서 들어가는 때이고 합격자 발표를 라디오로 해주던 시절인데

작은 라디오에서 기직거리며 흘러나오는 합격자 발표를 들으며 합격 했다고 좋아 하는 누나를 보면서 나도 덩달아 좋아 했던 생각이 난다.


나중에 엄마에게서 들었지만 그때 합격 했다는 누나의 소리에 가슴이 철렁 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 등록금과 수업료를 내면서 가르쳐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차라리 떨어질 것을 은근히 바랐다는 말씀을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야 하셨다.


아마도 나의 아버지와 엄마는 부부금슬이 참 좋으셨던 것 같다.

엄마는 가끔 시장에 다녀오신다고 하며 나갔다 오시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거의 죽어가는 모습으로

오셔서 자리에 눕곤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뱃속에 생긴 동생을 지우고 오신 것이었다.

그런 일을 내 기억으로도 서너 번은 되는 듯 하다.

그리고 또다시 이사를 몇 번은 더 다녔던 것 같다.


한번은 명지데 근처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누나와 같이 이사 갈 집에 가보니 아버지께서

신발도 벋지 않으시고 거실마루에 대자로 누워 계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 좋다!"

그 집도 방이 두개인 아담한 양옥집이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너무 좋은 집이었다.

지금도 나는 내 아들에게 얘기를 해준다.

그때 아버지의 그 "아 좋다!"라는 말 속에 무슨 뜻이 있었는지를...

지금도 그 처음의 시천교 집 앞을 지나서 퇴근을 한다.

그러면서 늘 저곳에 가봐야지... 생각 했었는데 지난 토요일에 그곳을 다녀왔다.


근 사십년이 흘렀으니 많이 변했으리라 생각은 했었지만

여기저기 다녀보며 옛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리 많이 변하진 않았다.

어릴 적 뛰놀던 산동네의 살던 집은 없어 졌지만 그곳은 잡풀이 우거져 그나마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가슴이 찡함을 느꼈다.


참 빠른 세월이다.

이 글을 또 십년이 흐른 뒤 읽을 수 있을까?

아마도 내가 살아있고 파란블러그가 닫히지 않는한 읽을 수 있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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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는 좀더 위에 기와지붕의 종탑이 옆에 따로 있었던 교회다.

일요일에는 목사님이 땡그렁땡그렁 종을 쳤었다.

처음엔 "청산교회"였었는데 낙원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산동네 집을 내려오면 지금 기사식당 자리에 유리병 공장이 있었다.

이 길을 큰 자전거를 삐딱거리며 무수히 다녔는데...

그리고 첫사랑의 데이트도...



 

집으로 오르는 골목길이다.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오르면 통하는 길이 막혔다.


 

골목을 오르니 이렇게 막혀버렸다.




 

길위에 꽃이 아름다워...



 

세장을 이어서 파노라마 사진으로 본다.

맨 오른쪽이 공동수도가 있던 자리이고 왼쪽의 개나리 바로 뒤가 우리 집이었다.

그때는 참 넓어 보였는데...



 

여기가 우리 집터이다.

그래도 다시 집을 짖지않고 남겨 두어서 옛 생각을 더듬을수 있었다.





 

새끼 청솔모가 걸음도 제데로 못걷는데 느닫없는 나의 방문에 놀란듯 ...



 

그 후에 산동네 밑에서 국수집(기계 한데 놓고 하는)을 했었다.

그집은 철거되고 이렇게 주차장으로...



 

삼일 순복음교회 근처의 또 다른 살던 집이 있던 곳인데 미용실 간판을 단 오층짜리 건물이 들어 섰네요.



 

큰길에서 내 살던 여러 집들로 들어서는 골목의 초입입니다.



 

또다른 골목입구.




그리 기대만큼 옛 기억을 더듬을 수는 없었지만 좋은 추억을 간직 할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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